제주의 슬픈 역사
제주를 관광하기 위해 그 역사를 살펴보았는데 우리가 일제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잘 알고 있지만 원나라(몽골)가 제주에 설치했던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총(摠)자의 뜻은 ‘다스릴 총이다.)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치욕의 역사라서 감추고 싶은 이름이겠지만 엄연한 역사이다.
일제의 통치기간은 36년 인데, 여러 자료를 찾아보니 몽골의 한반도침략기간은 47년간(고려말 1231~1278)이며 제주의 통치기간은 102년간(1272년~1374년)이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몽골이 지배한 100년의 제주역사’라고 말한다.
몽골의 한반도 침략사의 자료를 정리해 보면 대략 이러하다.
원(몽골족)나라는 한반도(고려)를 끊임없이 침략했으며 1272년엔 제주까지 밀려와 끝까지 저항하던 삼별초군(아래 설명 참고)이 여몽연합군에 의해 완전 섬멸되고 난 뒤 제주는 몽골의 지배에 들어간다.
고려말 무렵부터 우리나라는 몽골의 부마국(駙馬國, 사위의 나라)이 되어 한반도 전체가 몽골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직도 여러 곳에 그 잔재가 남아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제주도는 몽골의 말 생산 기지 즉 목마장으로 사용 되었으며 당시 몽골인 들이 다루가치(아래 설명참고)를 파견하여 제주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고려 제 25대 충렬왕(忠烈王 1236~1308)은 원종의 장자로 태어나 1272년 원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2년 뒤인 1274년 원나라 세조의 공주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과 강제 결혼해 살다가 이듬해인 1275년에 귀국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원나라에서 결혼한 몽골의 공주는 고려 왕위에 오른 남편 충렬왕 보다 2년 뒤인 1277년 개성으로 시집오면서 수백여 명의 시종들을 거느리고 들어온다. 이 때 충렬왕은 공주를 수행하는 원나라 벼슬아치들에게 한국성과 이름을 준 사실이 고려사 기록에 나온다. 이런 연고로 원나라 공주를 수행해 와서 우리나라로 귀화한 성씨가 20여개에 달한다는 보고도 있다.
몽골 사람들이 제주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제주 삼별초를 토벌했던 고려말이다. 1277년 몽골은 제주도에 원나라(몽골인) 다루가치와 목장 관리인들을 주재시켜 사실상 몽골의 속지가 되었다.
통계청이 조사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제주시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 가운데 제주의 대표적인 성씨인 고, 양, 부씨를 제외한 기타 성씨 중에서 제주를 본관으로 한 성씨는 20여개에 달하는데 이들은 원나라(몽골인)의 제주 귀화인들로 보인다.
이밖에 문헌에 나오는 월남의 제주 귀화 성씨는 화산 이씨 외에 밀양 이씨, 정선 이씨, 운남 강康씨, 등이 있다.
문헌에 보면 역사상 일본에서 귀화한 사람도 많고 멀리 화란에서 표류해 정착한 성씨도 2성이 있었으나 대부분 어디론가 종적을 감췄다. 목호(牧胡)의 자손이란 손가락질이 싫어 한국 성씨에 편입한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현재 제주도에 살고 있는 주민 중에는 보다 많은 몽고계 후손이 있을 것이나 한국본관 성씨에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제주자치도가 밝히고 있는 제주의 유래와 연혁은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의 기원은 석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 주거지에서 생활하였으며, 유물로는 타제석기(打製石器), 골각기(骨刻器)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후 청동기,철기시대의 유물,유적으로 고인돌, 마제석기, 토기, 옹관묘(甕棺墓) 등도 도내 전역에 분포되고 있어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의 기원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주의 옛명칭은 도이(島夷), 동영주(東瀛洲),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탁라(?羅) 등으로 불리어 왔다. 이들 명칭중 ''동영주''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섬나라'' 라는 뜻이다. 제주도의 개벽신화인 3성(三姓)신화에 의하면 태고에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 라고 하는 삼신인(三神人)이 한라산 북쪽 모흥혈(毛興穴:현재의 삼성혈) 이라는 땅 속에서 솟아나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들 삼신인들은 ''벽랑국(碧浪國)'' 에서 오곡의 씨앗과, 송아지, 망아지 등을 갖고 목함을 타고 제주특별자치도 동쪽해상으로 들어온 삼공주를 맞아 혼례를 올렸다. 이때부터 이들은 오곡의 씨앗으로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기 시작했다. 그후 ''고을나''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가 당시 한국의 고대왕조의 하나인 ''신라''(B.C 57~A.D 935)에 입조(入朝)하여 ''탐라''(제주특별자치도의 옛명칭) 라는 국호를 갖게 되었고, 또 이때부터 ''탐라''는 ''신라''를 섬기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탐라국은 고구려, 백제 및 신라로 분열된 삼국시대에는 이들 나라들과 독자적으로 혹은 그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외교관계를 맺어왔다 이러한 관계는 그후 고려 시대에도 계속되면서 탐라국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 1105년에는 고려의 행정구역인 탐라군으로 바뀌었으나, 왕자의 지위는 그대로 존속되어 실질적인 탐라의 통치자 역활을 하였다. |
삼별초(三別抄)란? 고려는 1231년부터 30년 가까이 몽고의 침략을 받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몽고의 침략에 대해 당시 최씨정권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서 저항하였다. 몽고의 압력에 의해 무인정권이 붕괴되고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자, 이때에 삼별초(三別抄)가 대몽항쟁의 기치를 들고 저항하였다.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시초는 밤에 도둑을 단속하는 데 있었지만 차츰 그 임무가 확대되어 경찰임무인 포도(捕盜) 금폭(禁暴) 형옥(刑獄) 국수(鞠囚) 이외에 군사임무인 도성의 수비를 비롯해 친위대ㆍ특공대ㆍ정찰대의 구실도 하였다. |
다루가치[達魯花赤, darughachi] 고려에 파견되었던 몽골 관직 중의 하나. 다루가치는 '진압한다'는 뜻의 daru에 명사어미 gha와 '사람'을 가리키는 chi를 붙여서 '진압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하는 몽골어이다. 몽골족은 정복지에 다루가치를 설치하여 통치했다. 고려에도 몽골이 침입한 초기부터 배치되었다. 처음 배치된 것은 제1차 몽골침입이 있었던 1231년(고종 18)이다. 몽골의 총지휘관인 살리타이(撒禮塔)가 철군하면서 서경(西京:지금의 평양) 등 북계(北界:지금의 평안도)에 배치하였다. 〈원사 元史〉 고려전에 의하면, 이때 72명의 다루가치가 40여 개 성에 배치되었는데 이듬해 모두 고려인에게 사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다루가치가 배치된 성이 실제로는 14개였고 다루가치의 수도 훨씬 적었을 것으로 보며, 모두 살해되었다는 것도 당시 상황으로 믿기 어렵다고 한다. 이때 배치된 다루가치는 북계의 각 성(城)에 따로 두어졌던 것 같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이 결정되고 난 다음부터 몽골은 고려 왕경(王京)에 고려국사 전체에 간여하는 다루가치를 파견했다. 1270년(원종 11) 다루가치는 부(副)다루가치와 함께 파견된 이래 일정한 임기를 두고 계속 파견되었다. 이들은 원나라가 고려를 통제하고 감독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였다. 따라서 원나라의 명령에 따라 내정간섭을 했으며, 고려에 나와 있는 원나라 관원과 고려인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을 해결하기도 했고, 원나라에 죄를 지은 고려인을 처단하기도 했다. 1278년(충렬왕4)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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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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