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국제정치

우리 민족의 악인 이방원

휘처라인 2017. 1. 9. 07:57

한민족의 악인 이방원

          

2006.04.18. 18:13       

이성계의 5남으로써 이조태종

위화도 대반역으로 한민족정권인 고려를 멸망시킨 공범이며 철저한 중국 속국을 만든 주범.
 
 

1367∼1422. 이씨조선 3대왕.  왕위기간 1401∼1418. 역대 이조왕 중 가장 잔인하고 철저한 무도,살륙정치를 실현하여 이씨조선 500년 기틀을 닦은 정치인. 태조 이성계의 5째 아들로 이씨조선 개국에 1등공신이나 그 무도함에 주변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여 왕위 계승은 커녕 공신 대접도 받지 못했으나, 세자의 직위를 이용,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다.

 

정권 장악 과정에서 정도전을 비롯한 자신보다 낳은 사람이나 정적들은 세자를 포함,자신의 배다른 형제,아내의 오빠인 처남들에게까지 억울한 누명을씌워 모조리 살륙한후 철저한 중국속국으로써의 이씨조선 500년 역사의 기틀을 세웠다.(이씨조선의 통치방법은 말 그대로 다죽여! 라고해도 과언이 아님)

 


 

 이조태조 이성계의 5째 아들, 본명은 이방원. 이성계의 아들 중 가장 총명해,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1383년 문과에 급제한 수재.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왕이 되게한 제1공신)
 

아비 이성계와는 달리 문무를 겸해 문관으로써 명나라의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고, 이성계 장군을 따라 고려를 침략한 외적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위화도 회군 후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시작, 1392년 정도전을 비롯한 이성계 일파가 정몽주 세력에 의해 위기에 몰리자 정몽주를 암살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한다. 당시 이성계는 정몽주 살해에 반대했으나, 이방원은 이에 아랑곳 않고 이성계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참사시키는 대담함과 비정함을 보인다. (일각엔 이방원이 일부러 이성계가 사주한 것처럼 보이려고 이성계 집을 찾은 정몽주를 노렸다는 설도 있음.) 어쨌든, 그의 “활약”으로 이성계 일파는 정치적 몰락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곧바로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넘겨 받아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정안군으로 책봉. 그러나 이방원과 그의 형제들은 개국 공신에서 철저히 제외됐을 뿐 아니라, 태조의 둘째 부인인 현비(신덕왕후 강씨)와 정도전 등에 의해 세자책봉에서도 탈락된다. (이때 이성계는 현비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무리수를 둔다. 이는 태조의 본처인 신의왕후 한씨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 정실 부인도 아닌, 후실의 둘째 아들을 세자로 둔데 대해, 왕위를 물려 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방원과 그의 형제들은 엄청난 불만을 품는다. 게다가 태조의 철저한 신임을 받는 정도전의 독주가 계속되면서 조정 내 “반체제 세력”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정도전 일파가 (이방원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꾸며댄) 요동정벌 정책의 일환으로 자신의 세력 기반인 사병을 해산하려하자 1398년 형들과 합세하여 전 사병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제1차 왕자의 난이다. 방원은 곧장 궁궐로 쳐들어가 세자 방석을 붙들어 둔 뒤, 정도전과 그의 측근들을 모두 살륙한 후, “정도전이 어린 세자를 끼고 전횡을 일삼다가 이방원 자신을 비롯한 정실 왕자들을 제거하려 했다”고 발표 했다.  이어 세자 방석을 폐위시키고 궁궐 밖으로 내쫓은 뒤 살륙했다. 이후 방석의 형인 방번, 그들의 누이동생 남편인 이제까지 살륙함으로써 태조의 후실인 현비의 자손들은 (공주를 제외하고) 모두 살륙했다.

 

정변 직후 방원은 성계(태조)에게 왕위를 둘째 아들인 방과(정종)에게 물려주도록 한다. (이는 모두 방원의 계산에 의한 것으로, 그는 자신은 그저 왕위를 “올바른” 사람에 물려 주려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을 내세우기 위해 큰형인 방과를 “임시” 왕으로 즉위시킨 셈인데 이는 방과에겐 아들도 없어 임시직 왕으론 안성맞춤이었기때문이다.)

 

방원 자신은 정권의 실세로써, 정도전의 잔여 세력을 완전히 숙청하고 중요 자리에 자신의 측근들을 포진시키고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기 위한 정지작업을 마치고 마지막 작전에 들어가는데, 1400년 자신의 넷째 형 방간이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이 소문듣고 방간이 거병을 한다. (2차 왕자의 난) 이일은 방원이 사전에  계획한일인만큼 상대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간파하고 있었는바, 방간의 군대를 초전에 제압하고 방간을 사로잡아 지방으로 귀양보낸다. 그리고는 곧바로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아 태종이 된다. (정종은 이후 상왕으로 물러나 평범하게 살다 죽게한다)

 

방원은 정변과 숙청을 통해 역사에 유례없는 대살륙을 한 악마같은 자인데 아비와 형제는 죽이지 않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우상화글들이 있는데 무고한 배다른 형제 및 친척은 형제가 아닌가? 화교,이방인 정권의 특색인것이다.

 

이성계 역시 아들과 같이 정치군인이었다. 마침내 권세에 눈이 어두운 아들 방원이 아비를 죽이려하자, 1402년,자신의 후실로써 현비의 친척인 조사의등을 앞세워 전쟁을 일으키나 조사의군은 방원의 작전에 의해 패퇴하였고, 이성계는 사로잡히고 만다. 이후,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방원의 언약을 받고 조용히 살다가 죽는다.

 

이후 방원은 신하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왕권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꼽았다. 이들이 서로 이합집산하며 세력을 키울 경우 왕권이 무력화 될 것을 우려, 공신과 외척들을 차례로 살륙하기 시작한다.

 

1404년 1, 2차 왕자의 난 때 핵심적 역할을 했던 최고의 공신 이거이를 역모 발언 사건에 연루시켜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1407년에는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사소한 발언을 꼬투리 잡아 살해하고. 1409년에는 민무구와 연계시켜 이무, 윤목, 유기 등을 살해하고,  1415년에는 불충스럽다는 이유로 처남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살해했으며, 같은 해 자신의 말에따라 살륙을 집행해오던 심복이었던 이숙번등을 귀양,은퇴시킴으로써 왕권에 위협이 되는 공신 세력을 모조리 싹쓸이했다.


태종의 공신 축출의 표적은 순전히 자신의 본처, 원경왕후 민씨의 가족들이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딸로 아녀자의 몸으로 위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남편이 왕에 오르는데 실질적 공을 세웠던 민씨.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엔 태종의 방탕한 생활(여성편력), 자신의 형제들의 연이은 처형으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다. 민씨 가족들은 정권 초기 때부터 태종의 견제 의도를 눈치채고 숨 죽이고 살았으나 그럼에도 결국 죽음을 맞고 말았다.(무조건 충성하는 하륜같은자는 부정부패도 눈감아주었으나, 정직한자는 그냥 죽여버렸다

 

이렇게함으로써 안으로는 정의에 반항하는 여지의 싺을 모조리 제거하고 밖으로는 중국을 아버지의 나라로 섬김으로써 중국인 이조태종은  화교정권 이씨조선 500년의 기틀을 닦아 놓았던것이다. 

 

하륜.

 

1347-1416. 퍼런 태종의 공포 정치 치하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극소수의 공신 중 하나. 일찍이 이색 학원에서 수학, 정도전 일파와 가깝게 지냈으나 태조 정권 때 능력을 인정 받지 못해 지방관리를 전전했다. 이방원과의 만남 이후 반란을 기획,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통해 왕이 되는데 결정적인 막후 역할을 한다. 태종의 정권 아래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며 각종 국가 대소사를 처리했다. 이 과정에서 셀 수 없는 비리를 저지른데다 각종 불충 사건에 까지 연루됐으나 태종의 철저한 신임에 의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가 태종을 등에 업고 방자한 행동을 일삼을 때 그의 친구이자 태종의 장인 민제가 “그리 방자하게 굴면 머지 않아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 이에 하륜은 “생사는 하늘에 달린 일이라 바른 일을 가다 억울하게 죽기도 하고 요행으로 죽음을 면하기도 하는 법”이라고 답했다고. 과연 그의 말대로 많은 죄를 저지른 하륜은 끝내 살아남고, 숨 죽이며 조신하게 살던 민제 일가는 처참하게 몰락하고 만다.

 

왕권 강화에 성공한 방원은 고려문화를 배격하고 중국문화를 철저하게 따랐다.

 

결국, 전주이씨의 번식만을위한 이씨조선의 나라, 그 왕권 강화가 최대의 목표이었다.

 

 

(이씨조선 정권의 500년 통치방법은 쿠데타로 왕권을 잡은후, 왕권에 위협을 줄수있는 뛰어난 위인 즉, 명재상이나 장군, 부자들을  철저하게 배격한것이었다. 그 정책으로 사농공상천시, 양반병역면제,유교의 국교정책을 실시하여 그때문에 중국의 전주이씨왕족은 번식하였으나 백성들은 한민족역사에 유례없이 가난과 빈곤한 생활을 대물림하다가 결국 강대국의 노리게가 되었으며 일본에 의해 나라가 없어지는 결과로 끝난것이다. 이는 사필귀정 즉, 필연이었슴)


 

 

(참고 : 이조실록,연사)(조언: 해돋는산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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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민족참역사 |글쓴이 : 하늘과나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