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캐나다 견문록 마지막 글입니다

휘처라인 2017. 1. 9. 05:46

캐나다 견문을 마치고

       

2005.09.19. 18:12       

     

프랑스 식민지의 상징으로   몬트리올 시내에 세워진 메종뇌브 동상 앞에서 찍은 사진 1장 올립니다.

           "  Maisonneuve 1642년 " 이라고 쓰여 있다.     


 


캐나다 견문록의 마지막 글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2003년 8월에 실렸던 아래의 신문기사 내용 보면

홈쇼핑 이민상품 우울한 대박 ‥ 80분만에 1000명 신청 쇄도 

[한국경제 2003-08-29 17:04:00]

홈쇼핑업체가 이민상품을 내놓자 삽시간에 약 1천명이 몰려 1백75억원어치를 주문했다.

홈쇼핑 사상 최고의 대박이다.

화제의 상품은 현대홈쇼핑이 지난 28일 밤 11시10분부터 80분간 판매한 캐나다 마니토바주 이민상품.80분 방송시간에 9백83명이 1백75억원어치를 주문했다.

이는 홈쇼핑 8년 역사상 단일품목 단일방송시간 주문액으론 가장 많다.

현대홈쇼핑 판매상품은 마니토바주 <>독립이민 <>기술취업이민 <>비즈니스이민 등을 알선해주는 것.

가격은 답사비용 2백60만원을 빼고 각각 6백20만원, 8백50만원, 2천8백만원이다.

            


나는 이번 토론토 베낭여행중 퀘벡주를 가 보기 위해 토론토에서 떠나는 페키지관광 버스에 올랐다. 58명 좌석에 빈자리는 4석뿐.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자 안내원은 “우리는 2박 3일간 모두 한가족이나 다름 없으니 모두 자기소개를 해야 합니다. 오른쪽 앞자리에 있는 분 부터 앞으로 나와 소개해 주세요”


앞자리에 않은 관광객 중 위 신문기사의 마니토바주로 이민 와서 살고 있다는 40대 여인은 “중학교에 다니는 딸 형제와 함께 3명이 2년 전에 마니토바 주로 이민 와서 살고 있으며(마니토바 주와 토론토와의 시차는 1시간)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오셔서 오늘 새벽 비행기를 타고 관광차 오게 되었다” 고 소개 했다.

시름에 잠겨있는 듯한 젊은 엄마와 어머니는 각기 따로 앉아 서로 애기를 나누지 않고 있어서 이 들의 사이는 고부간 이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었고

한국에 남아 있는 아빠의 ‘뼈 빠지게 번 돈’으로 애들 공부시키고 있는 것이 뻔 했다.


한국에서 대학공부를 했다는 이 젊은 엄마가 들려준 얘기를 소개하면,

“서울 홈쇼핑에 마니토바주 이민 상품이 나왔었다고 하는데 요즘 이렇게 이민 온 사람이 많이 있다, 나는 그 이전에 왔지만.

마니토바주는 산이 거의 없는 벌판이며 주의 수도인 위니팩(Winnipec)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천여명? 정도이며 1980년대 초 봉제공들의 집단 이민이 기술이민의 시초이다. 한인 다수의 이민자들이 최초로 정착한 도시이며 농업과 천혜의 호수 주변으로 관광업이 발달했다.


‘위니팩로열 발레단’ 이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우리 점포의 간판을 갈아 붙이려고 주문을 했더니 한달이 지나서야 해 주는 이곳 사람들의 ‘천하태평 만만디’ 의 사고방식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요즘 마니토바주로 비즈니스 이민을 온 사람중 상당수가 이민 올 때 주정부에 납부한 보증금 미국달러 7만불(당시 1억원)을 포기하고 토론토쪽으로 다시 이주하고 있다.”


“1억원을 포기 하더라도 이 쪽으로 오면 아이들 학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괜찮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이민정책이 따로 따로 이며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중국 공무원들은 요즘 2자녀를 갖는 것은 위법이기 때문에 둘째 아기를 낳을 때에는 휴가를 내어 캐나다로 원정출산을 많이 하고 있다.”

                          

또한 가이더 생활 15년을 했다는 안내원의 이민 관련 말에 따르면

“통계를 보면 한국관광객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기러기 가족이 1/3, 유학생이 1/3, 순수 관광객이 1/3 이다”

“저는 이민을 권하고 싶지 않다. 캐나다가 살기는 좋을지 몰라도 돈을 벌려면 미국으로 가야지 캐나다는 결코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아니다.그래서 지금도 캐나다에 왔다가 미국으로 가기 위해 국경을 넘는 ‘산토끼’(주로 뱅쿠버쪽에서 미국서부 지역으로 불법 월경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은어) 가 있다.”   등등..


그런데 이상한 것은 겉으론 자기가 ‘기러기 가족’이란 것을 모두가 숨기고 싶어한다.

“당신도 기러기 가족인가? 라고 묻지 못하는 상황이다.

페키지 관광을 끝내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사실 우린 기러기 가족이다” 라고 실토하는 것을 볼 때 한편으론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 교육이 뭔지 .........


캐나다 이민에 대하여 부정적인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캐나다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보러 가는 것만으로 족하다.  뿌리 내리고 살만한 곳은 못된다고 결론 내려도 좋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선.

    x     x     x


지난번 퀘벡주의 분리주의자들의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끝맺음을 해야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퀘벡주는 원래 프랑스 영토 였으나 프랑스보다 100 여년 늦게 발을 들여 놓은 영국이 4차례에 걸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겨 빼앗은 땅이다.

그러니까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 낸 셈이다.(원래 주인은 인디언 이겠지만)


더 자세한 역사적 배경은


캐나다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0세기경 노르만인(人)에 의해서이며, 14세기 전반까지는 덴마크인이 거주하였으나 그 후 소멸하였다. 1497년 영국 국왕의 명을 받은 이탈리아인 존 카보트가 뉴펀들랜드 등 캐나다 동해안을 탐험하였다. 당시 캐나다에는 소수의 인디언이 살고 있었으며, 실제 캐나다라는 지명은 인디언 이로코이족(族)의 말에 있는 카나타(Kanata:부락이라는 뜻)가 어원(語源)이라고 한다.


캐나다 제 2의 도시이고 북미의 파리라 불리는 몬트리올은 파리 다음으로 큰 프랑스어 사용 도시이다. 1535년 프랑스의 탐험가 '쟈크 카르티에'에 의해 처음 발견이 되었으며 프랑스인의 본격적인 진출은 1608년부터 세인트로렌스강 연안에 퀘벡·몬트리올 등의 식민지 설립을 통해 전개되었다. 1642년 ‘메종뇌브’가 40명의 일행을 이끌고 지금의 Old Montreal 에 정착한 것이 공식적인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개막이 되었다.


반면 영국인의 진출은 1628년 노바스코샤 식민지의 설립과 동시에 본격화 되었으며, 그 뒤 150년간 뉴펀들랜드, 뉴브런즈윅, 프린스에드워드섬, 허드슨만 지방에 많은 식민지가 만들어졌다. 이들 식민지는 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독립해 있었다.


1701년 평화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원주민인 인디언과 이주민 사이의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나 조약체결 후 모피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모피 교역으로 눈부신 경제 번영을 이룬 프랑스인은 영국과 충돌하였고  이들 영국·프랑스 양 식민지간의 투쟁은 유럽에 있는 본국 간의 항쟁으로 이어져, 1756∼63년의 7년전쟁에서 영국군이 퀘벡·몬트리올을 점령하여  영국의 승리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1763년의 파리조약에서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캐나다에 있는 식민지와 미시시피에서 동쪽의 루이지애나에 이르는 지역을 빼앗았다. 이리하여 캐나다는 완전한 영국의 식민지 지배하에 놓였으나, 영국은 그 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에서 캐나다를 떼어놓기 위하여 1774년의 퀘벡법(法)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이는 퀘벡주의 구(舊)프랑스령 식민지에서 지주와 교회의 특권을 승인하는 대가(代價)로 프랑스계 주민이 미국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퀘벡주의 주도인 퀘벡 시티(Quebec City)는 캐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북미 대륙에서 유일한 성곽 도시이다. 과거 영국 지배 기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전통과 언어가 살아있어 주민의 95%가 불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전통에 긍지를 가지고있다.

1775년 미국의 침입을 막아낸 후 매사에 신중한 영국군은 성벽을 쌓는 공사를 완료해 퀘벡은 북미 대륙에서 유일하게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되었고 이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


영국은 미국측으로부터의 합병운동을 두려워하여 캐나다 식민지의 정치적 통합에 나서게 되었다. 1867년의 '영국령 북아메리카 조례(The British North America Act:BNA ACT)'에 따라 캐나다는 자치령으로서 정치적 통합이 인정되었다.


처음에는 퀘벡 ·온타리오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의 4개주만으로 구성되었으나 그 후 매니토바(1870)·브리티시컬럼비아(1871)·프린스에드워드섬(1873)·앨버타(1905)·서스캐처원(1905)·뉴펀들랜드(1949)가 합쳐져 현재는 이상 10개주와 유콘 및 노스웨스트의 2개 준주(準州)로 구성되어 있다.

(준주는 캐나다를 가로로 3등분 했을 때 맨 위쪽에 자리한 3개 주를 말하는데, 이곳은 기온이 낮아 소수의 인디언과 에스키모인이 살고 있어서 주의 기준에 미달되는 영토이다. 05년 현재는 누나부트 준주(Nunavut Territory)가 추가되어 3개 준주가 있음)



1926년의 영국제국회의는 캐나다 및 기타 자치령의 완전자치를 인정하였고, 1931년에는 웨스트민스터 조례에 의하여 주권국가로서 영연방을 구성하는 것이 법제화되었다. 1949년에 캐나다 헌법인 '영국령 북아메리카 조례'가 수정되어 캐나다의 완전독립이 법적으로 완성되었으며 1951년 12월 정식 국명을 캐나다자치령에서 캐나다로 변경하였다. 1982년 4월 17일 캐나다 최초의 헌법이 선포되어 영국과의 법적 예속 관계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근래의 퀘벡주의 분리운동은 어떠한 양상인가

1967년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캐나다 방문 중에 ‘자유퀘벡 만세’라고 소리쳤던 사건은 캐나다 측에서 내정간섭이라고 분개했을 뿐 아니라 캐나다 정부와 프랑스의 외교관계가 일시 긴박해졌을 정도로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퀘벡 문제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캐나다 건국 이래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퀘벡 지역에는 프랑스계 주민의 3/4(전인구의 약 29 %)이 살고 있다. 이들 프랑스계 주민은 소수민족으로 소외되기 쉬운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영어 외에 프랑스어도 공용어로 하는 등 각종 융화정책을 취하고 있지만, 민족문제로서의 퀘벡 문제는 근래 오히려 격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1970년에 있었던 주의회 선거에서는 연방으로부터 퀘벡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퀘벡당이 압승하여 ‘르네 레베스크’ 당수 주도하에 프랑스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하는 ‘프랑스어 헌장’이 실시되는 등 분리정책이 강행되었다.


81년 주의회 선거에서도 퀘벡당이 승리하자 이 기세를 몰아 퀘벡주를 포함한 8개주의 주 정부 총리가 오타와에서 회합을 갖고, 주권(州權)을 제한하려는 연방정부의 개헌조항에 대해, 헌법 개정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각주가 독자적으로 결정할 것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퀘벡주 정부가 87년 신헌법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함으로써 전체 10개주가 신헌법을 승인, 통일 캐나다의 실현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 등 탈연방 바람이 거세지자 퀘벡 독립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었다. 연방탈퇴를 막으려는 ‘멀로니’ 총리는 자치정부 수립 허용 등을 다룬 헌법수정안을 91년 의회에 제출하였다. 자치권을 확대함으로써 퀘벡주를 캐나다 연방의 일원으로 남게 하려던 헌법개정안이 92년 10월 반대 55 %로 부결됨으로써 퀘벡분리 독립운동이 가속화되었다. 그 뒤 93년 2월 ‘멀로니’가 사임하고 ‘킴 캠벨’에 이어 자유당의 ‘장 크레티앵’이 총리로 취임하기까지 퀘벡 문제는 중요한 국가적 변수로 남아 있었다.


1995년 10월 30일에 실시된 퀘백 주 분리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 투표결과 근소한 차이로 부결됐다. 퀘백 주민의 92%가 참여한 이날 투표는 부결되어 캐나다 연방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은 지난 80년 주민 투표 이후 다시 좌절됐다. 그러나 그 차이가 불과 5만 3000여 표에 지나지 않아 캐나다에서 퀘백 분리 움직임은 여전히 불씨를 남기게 됐다.


투표 결과에 실망한 수백 명의 분리 독립 지지자들은 몬트리올 시내에서 캐나다 국기를 태우며 경찰과 충돌을 벌여 심각한 후유증이 있었다. 분리 독립 운동 지도자들은 이 날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분리를 위한 또 다른 시도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퀘백의 분리 독립에 강경한 반대 입장을 보였던 장 크레티앵 캐나다 총리도 이 같은 투표 결과를 의식해 분리파인 ‘자크 파리조’ 퀘백 주 총리에게 "필요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함께 일하자" 고 제안하고  새로운 변화에는 "퀘백 사회의 특수한 성격 인정도 포함되어 있다."며 개헌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헌법 개정 문제는 퀘백을 제외한 다른9개 주가 반대하고 있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상은 여러 웹사이트 기사를 종합하여 다시 정리한 것임)


2005년 8월 현재는 어떠한가

역사적인 유적지와 종교적 명소들이 많은 퀘벡주의 모트리올과 퀘벡시는 매년 2,000만 관광객이 40억 달러를 소비한다고 한다. 퀘벡주는 다른 주와의 차별화를 실천하고 있었는데 그 예를 들면

    1) 모든 차량의 앞 번호판을 붙이지 않고 운행한다

    2) 철저하게 영어를 외면한다.(상인들 중 극히 일부만 경우에 따라  제한적으로 사용)

    3) 퀘백은 특별법에 따라 다른 주와 달리 대부분의 기념일과 공휴일을 따로 정했다

    4) 고유명사도 모두 불어 식으로 바꿨다. 예; KFC(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 PFK로.

 

우리나라 입장으로 바꾸어 본다면 경상도 쯤 되는 곳에서 분리 독립하겠다고 주민투표도 하고 데모도 하는 꼴인데, 이건 반역이 아닌가, 당장 주동자를 끌어다 주리를 틀 것이다. 병력을 동원하여 박살을 낼 것이다. 그런데 캐나다는 그렇지 않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병력이 4만 2천명밖에 안되어 그러는가?   

                                                                                                              - 끝 -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랑스 식민지의 상징으로   몬트리올 시내에 세워진 메종뇌브 동상 앞에서 찍은 사진 1장 올립니다.

           "  Maisonneuve 1642년 " 이라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