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의 상관이었던 '채명신 파월사령관' 傳記 펴낸… 81세 예비역 장군 박경석]
"월남전은 우리 조국을 수호하는 전쟁이 아니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탈취할 목표는 없다" -채명신
朴正熙와 독대 자리에서
"국민과의 약속 저버리고 정권 연장을 한다면 각하 생명을 끊는 것" 말해
그에 대한 전기(傳記) '불후의 명장 채명신'이 출간됐다. 필자 박경석씨가 81세의 예비역 장군임을 알지 못했다면 그냥 스쳐갔을 것이다.
그는 1950년 6월 1일 입교한 첫 4년제 정규 육사 생도였다. 가족과의 첫 면회날에 6·25가 터졌다. 실탄 장전하는 법도 못 배운 채 전쟁터로 실려나가 동기생 333명 중 140여명이 숨졌다(이들 기수는 1996년에야 육사 명예졸업장을 받음). 그렇게 살아남은 그가 월남전(戰)에서 대대장으로 참전했을 때 사령관이 채명신이었다.
"사령관의 부고(訃告)를 받고는 그동안 수집해온 자료, 생전 진술, 전사(戰史)를 바탕으로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며 썼다. 이 위대한 장군을 국민에게 꼭 알려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 박경석 예비역 장군은“장군은 봉분 있는 8평짜리에 묻고, 사병은 1평짜리에 화장하는 것은 세상 어느 나라에도 없다”고 말했다. /이명원기자
팔순 노인은 가공할 정력을 보였다. 50여일 만에 원고를 마쳤다. 나는 족탈불급(足脫不及)의 놀라움을 먼저 표시했다.
"육군 대위 때 시와 소설로 등단했다. 그때만 해도 현역 신분이라 필명 '한사랑(韓史郞)'으로 활동했다. 월남전에서 대대장으로 15개월 있는 동안 천막 안에서 '19번 도로' '그대와 나의 유산'이라는 두 권의 진중일기도 썼다. '19번 도로'는 32만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인세는 파월 전우 가족 후원회에 자동 기부토록 했다. 1979년 신군부 쿠데타였던 12·12가 있은 뒤 준장으로 예편했다. 그뒤 전업작가로 나서 쉬지 않고 글을 써왔다. 시·소설·전기·에세이 등 75권의 책을 냈다."
그의 작품'한강은 흐른다'는 라디오 방송으로, '오성장군 김홍일' 은 TV 3부작으로 전파를 탔다. '묵시의 땅'은 김좌진 장군을 처음 발굴했다고 한다. 전쟁기념관 등에는 그가 지은 시비(詩碑) 11개가 있다. 또 그는 역대 장군 15명의 회고록도 대신 썼다.
"세간에서 떠받드는 정일권·백선엽 장군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장군이 많았다. 김홍일·이형근·이한림 ·김영선·문홍구 등…. 이 중 채명신 장군이 으뜸일 것이다. 이분들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살아남았다. 불행하게도 권세와 영달을 누리는 사람들에 의해 대부분 가려졌다. "
―채명신 장군을 으뜸으로 치는 이유는?
"건국 이후 지금까지 그보다 더 전투 경험이 많았던 군인이 없었다. 제주도 4·3사태, 공비 토벌, 6·25, 월남전 등에서 그는 항상 야전에 있었다. 역대 군인 중 무공훈장도 가장 많다. 모든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이순신 이후 무패(無敗)의 장수였다."
―채명신의 리더십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조국이나 정의 등 거창한 대의(大義)보다 상하간의 전우애에서 비롯된다. 그의 지휘 방침은 '골육지정(骨肉之情)'이었다. 부하들을 친혈육처럼 여겼다. 모든 책임은 자신이 졌다. 그가 장군 묘역 대신 사병 묘역에 묻힌 것도 평소 신조에서 나온 것이다."
- 채명신 파월한국군사령관.
"승진에서 그의 덕을 본 게 없다. 월남전 시절 그의 사생활과 관련해 대놓고 비판해, 이에 격분한 그가 그해 진급 심사에서 나를 탈락시킨 적은 있지만. 그런 사적인 것을 떠나 그는 정말 위대한 장군이었다."
1965년 월남 파병이 결정된 직후였다. 군에서는 6·25에 참전해 무공훈장이 있는 장교들을 대상으로 파병부대 대대장을 선발했다. 당시 대대장 직책을 마치고 진해 육군대학 교수로 있던 그도 뽑혔다. 그는 강원도 홍천에 있는 수도사단사령부(맹호부대)로 가서 채명신과 처음 대면했다.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육사의 전신) 5기였던 채명신은 6·25 때 유격대인 '백골병단(白骨兵團)'을 지휘했다. 적 후방에 잠입해 인민군 중장이며 대남유격대 총사령관인 길원팔을 생포했다. 세계 게릴라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전과였다. 그와 함께 근무하는 것은 후배 군인으로서는 행운이었다."
―월남전에 대한 채명신의 생각은 어떠했나?
"월남 정부는 부정과 부패로 민심이 돌아선 반면, 월맹군 지도자 호찌민에 대한 신망은 높았다. 월남전에서 이기기는 어려울 것으로 봤다. 하지만 파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전입 신고를 받는 자리에서 '월남전은 우리 조국을 수호하는 전쟁이 아니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탈취할 목표는 없다. 그렇다고 군인정신을 일탈하면서까지 비겁하거나, 소극적인 전쟁군기를 보여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정확히 짚은 것이다."
―그때 파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무엇인가?
"월남전의 경제특수는 나중의 얘기고, 그때 파병하지 않으면 한국에 주둔한 미군 2개 사단 중 하나가 빠지게 돼있었다. 안보 공백이 생기는 것이다. 당시 우리군은 북한군에 전력상 열세였다. 북한군 병사들은 AK소총으로 무장했고,우리군은 M1 단발소총이나 카빈총을 썼다. 채명신은 '월남에 가면 우리 부대를 미군처럼 현대화할 수 있고, 전투 경험도 쌓을 수 있다'고 했다. 실제 월남전에 참전한 뒤로 우리군의 장비 현대화가 이뤄졌다. 개인 화기도 미군들이 사용하던 M14로 바뀌었다."
월남으로 파병하기 12일 전이었다. 전투훈련장에서 수류탄 사고가 발생했다. 한 사병이 잘못 던진 수류탄을 중대장이 자신의 몸을 던져 덮친 것이다. 그가 예하 중대장 강재구 대위였다.
"그 현장을 조사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웠다. 위대한 살신성인이었다. '나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런 내 감정을 담은 사건 개요와 함께 '사고 책임을 지고 대대장 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군복을 벗을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다음 날 채명신 사령관은 그에게 "기자회견에서 자네 보고서 대로 발표했다. 자네의 지휘 책임은 없다"고 통보했다. 그가 쓴 보고서는 나중에 교과서에'소령 강재구 이야기'로 실렸다.
―1980년대 이후 대학가에서 월남 파병은'미국의 용병(傭兵)''청부 전쟁' '제국주의 대리전' '양민학살의 주범' 등으로 비판받았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미군이나 월남군에 비해 훨씬 적었다. 공식 통계로 입증된다.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게 채명신 사령관의 방침이었다. 물론 일부 부대에서는 양민 학살은 있었다. 그 양민은 베트콩과 구별되지 않았다. 또 국제법적으로 작전 지휘권을 가진 군대는 '용병'일 수 없고 그 전쟁은 '청부 전쟁'이 아니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은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
―초등학교 시절 파월 장병에게 위문편지를 쓰고 '맹호는 간다' 같은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당시 채명신의 대중적 인기는 어떠했나?
"우리는 늘 외침(外侵)을 받는 역사였다. 그러다가 파월 한국군의 승전보가 연달아 날아오니 국민적 프라이드가 생겼다. 채명신의 대중적 명성은 대단했다. 미국의 전쟁 영웅 맥아더·아이젠하워가 그랬던 것처럼, '대통령감''박정희 다음은 채명신' 이라고들 했다."
1969년 5월 채명신은 파월 한국군사령관에서 물러나, 한직(閑職)인 대구의 제2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박 대통령의 측근 세력이 '월남에서 모은 탄피를 팔아 재산 축적'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 '강남 땅은 채명신의 것'이라는 근거없는 소문을 흘렀다. 또 그가 2군 사령부 산하 ROTC 단장들을 통해 대학가에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부추키고 있다는 보고도 올라갔다. 전혀 터무니없는 모함이었다."
채명신이 국방경비대 사관생도 시절 옆 중대장이 박정희였다. 그때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고 한다. 둘의 인연은 1951년 4월 채명신이 '백골병단' 활동에서 막 돌아왔을 때 시작됐다. 강릉 9사단 참모장이던 박정희가 그를 불고기집으로 초대했다. 박정희는 피로 얼룩지고 너덜너덜한 채명신의 점퍼에 관심을 보였다. "이봐, 내 것과 바꿔 입자"며 점퍼를 벗어 건넸다고 한다. 이런 인연은 5·16 쿠데타로 이어졌다. 채명신은 쿠데타 성공 후 '혁명 5인 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한 뒤 군으로 복귀했던 것이다.
"1972년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는 '만일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정권 연장을 한다면 각하 생명을 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두 달 뒤 세 번째 만남에서는 박 대통령이 '욕을 먹더라도 십자가를 메야겠어'라고 했다. 그는 '각하, 십자가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라고 반박했다. 그걸로 둘의 관계는 물건너갔다."
―감히 대통령 앞에서 '각하 생명을 끊는 것' '십자가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말라'는 말을 했을까. 이 대목은 과장된 것 같다.
"박 대통령에게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채명신 장군이 거짓말할 분은 아니다. 나중에 박 대통령이 시해되자 '그때 정치적 생명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었는데'하며 그는 무척 후회했다, 박 대통령에 대해 한번도 원망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정치적인 이유로 그가 참모총장(대장)이 되지 못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1972년 5월 30일)했다고 보는가?
"그렇다. 그가 예편한 직후 나는 대령 정복을 입고 집으로 찾아갔다. 그러자 검정 지프에서 요원이 나와 못 들어가게 막았다. 감시받고 있었던 것이다. 몇 달 뒤 스웨덴 대사로 발령받고 나갔다. 그 뒤로 그리스와 브라질 대사로 계속 바깥에서 지냈다. 신군부의 5공 정부가 들어섰을때도 귀국을 막았다. 1988년에야 들어올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한 달에 한두 번꼴로 그를 만났다. 정권마다 그에게 제의를 해왔으나 그는 군인으로 살고 죽겠다고 했다."
―그가 사병묘역에 묻히겠다는 말을 생전에 들은 적 있나?
"내게도 그 부탁을 남겼다. 마침 현충원 안장 하루 전에 청와대에서 그걸 받아줬다. 장군은 봉분 있는 8평짜리에 묻고, 사병은 1평짜리에 화장하는 규정은 세상 어느 나라에도 없다. 장군 출신들 눈치보느라 못 바꾸고 있는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