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백두산 서파(西坡)등정기

휘처라인 2017. 1. 22. 10:33

2014 05.


백두산 서파(西坡)등정기

 

 


 5월 30일에 오른 백두산에선 천지의  검푸른 수면을  볼 수 없었지만  얼어붙은 천지(天池)의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가장 많이 가는 북파(北坡)코스는 연길 공항에 내려 백두산에 오르는 건데

가장 먼저 개발돼 잘 알려진 코스입니다. 장백폭포, 천문봉 등이 북파코스에 있습니다. 차량을 타고 편리하게 천문봉까지 올라갈 수 있고, 온천수가 흘러나오는 모습도 장백폭포 옆에서 볼 수 있다고 하며. 서파(西坡)코스에 비해 관광객이 몇 배나 많다고 합니다.

 

저는 이번에 북파코스가 아닌 서파(西坡) 코스를 선택했습니다.

 

서파코스는

대련시(大連)공항 -> 단동시(丹東; 1박) -> 집안시(集安)  -> 통화시(通化; 1박) -> 백산시(白山) -> 서파 백두산 -> 天池

 

  

인천공항에서 아침 9시 45분에 이륙하는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만에 대련(大連市) 공항에 내려 성해공원을 잠시 둘러보고 바로 전세버스로 4시간 거리인 단동(丹東市)에서 압록강을 본 다음, 이튿날 아침 7시에 5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집안(集安市)에 도착해 광개토태왕비와 장수왕릉을 본 다음,  1시간 40분 거리인 통화(通化市)로 이동하고,  이튿날 새벽 5시에 호텔을 출발 백산(白山市)을 거쳐 4시간 30분 만에 백두산 서파코스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5호 경계비가 있는 곳이 서파 코스의 목적지입니다.

 

  

백두산 서파 입구 매표소

 

 

 

백두산 들어가는데 1인 당 두 장의 티켓을 매표구에서 끊어야 하는데,

위의 85元짜리 티켓은 셔틀버스 탈 때 보이는 것이고,

아래의 공짜 티켓 이라고 적힌 표는 백두산 입장권입니다.

 

위의 것은 長白山旅游股份有限公司(장백산관광주식유한회사)가 발행한 것이고

아래 것은 吉林省長白山开发建设(集团)有限責任公司(길림성 장백산 개발건설(그룹)유한책임회사)가 발행한 것임.

 

 

 

 

훤칠한 자작나무 숲길을 따라 셔틀버스를 타러 10분 정도 걸어간다.

 

 

 

천지에 가기 위해 셔틀버스를 타고  지그재그 언덕길을 올라야 한다. 

 

 

도로변으로 치워 낸 눈이 아직 남아있고, 분재 모양을 한 자작나무의 싹은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버스길을 낼 수 있는 곳까지 최대한 길을 닦아 놓은 것으로 보이는데

황량한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40여분을 기어 오르고....

 

 

셔틀버스 정거장에 내려  1,442개의 나무 계단을 오르고 있습니다. 이 나무 계단은 젊은 사람 기준으로 30분 정도 올라야 천지에 도달할 수 있다.

나무계단과 나란히 화강암의 돌계단도 설치됐는데 눈에 덮여 잘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 내려다 본 셔틀버스 정거장의 모습

돌계단의 모습은 눈에 덮여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치 눈 터널을 지나는 듯....

해발이 제법 되는지라 걸어오르면 저절로 호흡이 가빠지더군요.  

 

 

힘겨운 사람을 위해 2인조 ‘가마’ 10여대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노인들이 주 고객인 듯...

 

 

등정성공   내 체력이 정말 대단하구나!! 

나무계단을 다 오르면 드디어 해발 2,470m 고지의 천지 옆에 도달합니다.

 

 

 

만세 소리는 못내고 손짓만 했습니다. 이번 백두산은 5월 30일에 본 모습이기 때문에 천지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6월 말 되어야 천지의 얼음이 녹는다고 하네요. 9월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강한 맞바람을 맞으며 ......오른쪽 끝의 큰 봉우리가 백두산 최고봉인 해발 2,749m의 ‘장군봉’ 입니다.

 

 

 

 아래는 천지 주변의 입간판들 

 

관광규정을 준수하고, 국가 형상(품위, 국격?)을 유지하자 !!

 

 

백두산 천지는 화산의 분출로 형성된 칼데라에 물이 괴어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호수입니다.

쑹화강과 두만강 압록강의 발원지이며, 둘레가 14.4km 면적이 9.17km2 에 이르며 평균 수심은 213.3m 이고 가장 깊은 곳은 무려 384m에 이릅니다. 천지 주변은 16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잿빛의 봉우리들은 눈이 시릴 만큼 푸른 천지와 대조를 이루며 거울처럼 투명한 호수 위로 반사되어 형용할 수 없는 장관을 이룹니다.


 

조중 37호 경계비 (예전 5호 경계비) ; 국경을 표시하는 경계비, 비석 반대편 면에는 ‘中國’ 이라 써 있다.

 

 

 

중국 당국은 더 많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백두산 서파 입구까지 고속도로를 건설하느라 부산하다.

 

그리고 현재 백두산 인근에 작은 비행장이 있어서 여행사들이 1박 2일 정도의 비행 관광 상품을 내놓고 있다는데 가격은 150만원 ~ 200만원 정도라고 한다. 버스 타기 버거우면 이걸 이용하시길....

 

 

 

 

 

공사장 주변 강가엔 골재 채취하느라 곳곳이 파헤쳐져 맑아야 할 강물은 흙탕물로 변해있었다.

 

역순으로 내려오는 길에 장백대협곡을 둘러봤습니다.    자연이 빚어낸 이 천하 절경을 다음 게시물로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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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아래는 백두산 국경에 대한 서울경제 신문 기사

 

[리빙앤조이] 백두산 경계의 유래 입력시간 : 2007/01/10 13:07

 

62년 朝·中조약으로 확정… 조약 효력 싸고 불씨 남아

 

백두산은 현재 북한과 중국의 영토로 나눠져 있다. 양국은 외륜봉인 동쪽 자암봉에서 서쪽 제운봉을 경계로 백두산을 반분하고 있다. 자암봉에는 6호 경계비가, 제운봉에는 5호 경계비가 있어 국경 역할을 하는 데 이에 따라 천지의 45%가 중국 영토에 속하게 됐다. 현재 백두산 자락에는 21개의 경계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과 중국은 지난 62년 10월 평양에서 ‘朝ㆍ中국경조약(중국은 중조변계조약이라고 한다)’을 맺고 백두산의 분할을 포함한 양국간 국경을 확정했다.

 

당시 조약체결 과정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한국전쟁 때의 중국 지원군 파견에 대한 ‘선물’로서 북한이 양보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중국으로서도 백두산을 성지로 여기는 만주족 청나라를 계승했다는 이유로 영유권을 주장해 왔는데 협상이 결국 중간선에서 타결됐다는 것이다.

 

백두산 경계 문제는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1712년 5월 천지 동남쪽 해발 2,200m 지점에 세워진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경계비에 새겨진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西爲鴨綠 東爲土門)’는 여덟 글자가 이후 300년 동안 논란을 불러왔다. 정계비 건립 직후부터 조선과 청나라가 ‘토문’을 전혀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토문강을 비석 위치에서 잠시 동북쪽으로 흐른 다음 북상해 쑹화강과 합류하는 토문강이라고 주장한 반면, 청나라는 두만강이 토문강이라고 반박했다. 두만강의 중국식 표기는 도문(圖們)강으로 발음이 비슷하다.

 

그러는 동안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인 ‘간도’ 지역으로 조선인들의 이주는 계속 됐고 이에 따른 청나라와의 충돌도 이어졌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청과 간도협약을 맺고 무단으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면서 조선의 국경은 공식적으로 두만강으로 후퇴하게 된다.

 

하지만 강으로 경계를 나눌 수 없는 백두산 자락에서의 분쟁이 지속되면서 결국 1962년에 와서야 최종적으로 국경선이 확정된 것이다.

 

한국 국내에서는 간도협약 뿐만 아니라 조중국경조약이 무효라는 주장이 적지 않아 남북통일 후 다시 논란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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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조중국경조약 내용이 세상에 밝혀지지 않아 구구한 설만 난무합니다.

이번 중국여행 시 백두산 경계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백두산의 경계는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천지를 중심으로 백두산 꼭대기 부분의 경계는 3/5 이 북한 땅이고,  백두산 밑 부분(나무가 있는 곳)의 3/5 은 중국 땅이다.“ 라는 것입니다.

출처를 밝히지도 않았고 신뢰수준이 어느정도인지 모르겠으나 정말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조약 원본을 봐야 확실해질 것입니다.   보자는 말을 언제쯤 꺼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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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백두산 국경에 관한 조선일보 기사입니다.

입력 : 2014.06.24 04:16

 

'백두산이냐, 창바이산(長白山·백두산의 중국 명칭)이냐'는 한·중 대립은 복잡한 백두산 영유권에서 비롯됐다.

1712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백두산 정계비를 천지(天池) 남동쪽 4㎞ 지역에 세우면서, 천지를 포함한 백두산 북쪽은 청나라가 차지했다. 청나라 강희제(1654~1722)가 여진족의 발상지인 백두산에서 제사를 지내길 바랐기 때문이다. 백두산의 남쪽 부분은 조선 영토로 확인받았다. 중국은 백두산을 12세기부터 창바이산으로 불러왔다.

을사늑약 이후인 1909년 일본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체결하면서 백두산 정계비와 석을수(두만강 지류)를 기준으로 국경을 정했다. 이 국경은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하며 무효가 됐다. 북한은 1962년 중국과 국경 조약을 체결하면서 백두산 남동부 영유권을 얻었다. 현재 백두산 전체의 75%는 중국 땅, 25%가 북한 땅이다. 백두산 천지는 54.5%를 북한, 45.5%는 중국이 관할한다. 구글 인터넷 지도는 창바이산과 백두산을 병기한다.

역사가들은 고구려에서 태백산, 고려에서 백두산이라고 부르다가 조선 세종 무렵부터 백두산·장백산(長白山)을 혼용한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 세종실록과 선조실록에는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