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광개토태왕비와 장수왕릉

휘처라인 2017. 1. 22. 13:57

2014.05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광개토태왕비석과 능을 보려고, 장수왕릉에서 대기하던 관광버스를 타고 5분 여 이동해 갔습니다.

 

능 출입구에서

중국 관리인들이 정문 앞에 임시 탁자를 내놓고  장수왕릉 입구에서 끊었던 입장권을 확인하고 들여보낸다.

 

 

 

중국에선 광개토태왕을 호태왕(好太王) 이라 하고,

광개토태왕릉을 태왕릉(太王陵)이라고 ...

 

중국에서 은밀히 추진해 왔던  동북아공정에 의해  우리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의 변방 역사로 둔갑 편입되는 그 역사의 현장이다.

 

 

소위 중국의 동북공정 [東北工程]이란 무엇인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내용은

  

중국이 자국의 국경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을 줄인 말로,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를 뜻한다. 이 연구를 통해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즉, 중국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성립된 국가이며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므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역시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이다. 동북공정에서 한국 고대사에 대한 연구는 고조선과 고구려 및 발해 모두 다루고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고구려이다. 즉 고구려를 고대중국의 지방민족정권으로 주장하고 있다.

 

 

기사 관련 사진

 

▲ 2002년까지 일반에 촬영을 허가하던 중국은 이후 보호막을 씌우고 촬영 등을 막았다.(자료 인용)

 

 

 

호태왕비(虎太王碑) 라는 나무 간판이 추녀 밑에 걸여있다.

비석이 있는 유리 건물 내부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고, 유리창 밖에서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중국경비원이 밀착 감시하고 있다.

 

 

 

 

여행사 상품 자료의 설명,

 

광개토태왕의 아들 장수왕이 왕 2년(414년)에 광개토태황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높이는 6.39m로 한국 최대의 크기로 고구려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너비는 1.38 ~ 2.00m 이고 측면은 1.35 ~ 1.46m 로 불규칙합니다.

 

 

 

유리창 밖에서 찍은 비석의 표면, 글자는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게 남아있고 

 

 

 

 

 

인터넷 공간엔 광개토왕 비문과 동북공정에 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작성한 게시물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선 가급적 말을 아끼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나라가 예산을 들여 만든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작성한  한중 양국의 역사인식, 쟁점, 진행과정과 앞으로의 전망 등을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게시물 중 핵심 내용을 아래에 게시했으니,  더 많은 내용을 보시려면 http://www.nahf.or.kr 을 클릭해 보십시오.

 

                                                             아   래

고구려사를 둘러싼 논란의 경과

 

고구려사를 둘러싼 논란은 이른바 ‘동북공정’에서 중국학계가 “고구려는 중국의 고대 소수민족 지방정권이었으므로 고구려사는 중국사에 속한다.”고 보는 인식 아래 고구려사 연구를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동북공정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로,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센터(http://bjzx.cass.cn/)에서 2002년 2월 28일부터 5년간 시행한 연구사업이다. 동북공정의 연구대상은 고구려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 등 중국의 동북 3성지역에서 일어난 과거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 전망을 포괄한다.

 

그러나 동북공정의 내용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2003년 당시, 고구려사의 중국사 귀속 관련 연구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일반에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사건으로 , 또는 ‘고구려사빼앗기’ 사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우리 학계와 국민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한중 두 나라 정부는 2004년 8월 고구려사 문제를 더 이상 확산시키지 않고, 학문적 차원에 국한시킨다는 내용의 구두양해각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양국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동북공정의 연구 결과물이 발간되는 등 공정의 논리가 확산되는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2006년 9월과 10월, 노무현 전대통령이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와 후진타오 주석에게 이 문제를 지적하며 시정을 요구했고, 중국의 최고 지도자는 구두 양해각서를 반드시 이행하겠다고 화답했다. 또한 2007년 2월로 5년 계획으로 추진된 ‘동북공정’은 외견상 종료되었다.

 

하지만 사업이 종료되었다고 해서 동북공정식 고구려 연구도 종식된 것은 아니다. 동북3성의 사회과학원과 대학 산하 연구소들이 고구려사 연구를 기반으로 새로 설립되거나 확대 개편되어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동북공정 기간을 거치면서 중국내 고구려사 관련 연구인력이 양적으로 확대되었고 학과의 개설을 통해 양성된 학문 후속세대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향후 이들이 관련 연구를 주도해 나가리라는 점에서 동북공정식 고구려사 연구는 활성화될 것이라 예상된다. 동북지역의 박물관 전시에 동북공정식 인식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사를 둘러싼 역사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여전히 남아 있으며, 또 다른 형태의 동북공정식 고구려사 연구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문제이다.

 

 

고구려사를 바라보는 중국학계의 인식은 여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고구려는 중국의 고대 민족이 세운 중국 고대의 지방정권이었다.

둘째,  고구려는 한사군의 현도군 고구려현 경내에서 건국했고, 427년 낙랑군 경내인 평양으로 천도했으므로 시종일관 중국 영역 내에 존재했다.

셋째,  고구려는 중국왕조의 책봉을 받고 조공을 했던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

넷째,  수· 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중국 내부의 통일전쟁으로, 중앙에 항거한 지방정권의 반란을 평정한 것이었다.

다섯째, 고구려 유민 가운데 신라로 들어간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중국인이 된 사람이 더 많았다.

여섯째,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가 아니다.

 

이러한 인식은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 속하는 지역의 과거사는 모두 중국사’라고 보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이론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현재 상황에 의거하여 과거의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역사왜곡의 소지가 많은 역사관이다.

 

이에 대해 한국학계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첫째,  고구려는 예맥족이 건국한 나라였으며 고구려 사람들 스스로 중국인들과 별개의 존재라고 여겼다.

 

       (게시자 註.  예맥족; 백과사전 내용, 예맥(濊貊)은 고대 한민족의 종족명으로 한반도 북부와 중국의 동북부에 살던 한민족(韓民族)의 근간이 되는 민족 중 하나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예(濊)와 맥(貊)을 갈라 보는 견해에서는 예족은 요동과 요서에 걸쳐 있었고 맥족은 그 서쪽에 분포하고 있다가 고조선 말기에 서로 합쳐진 것이라고 보며, 예맥(濊貊)을 단일종족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예맥은 고조선의 한 구성부분을 이루던 종족으로서 고조선의 중심세력이었다고 본다.)

 

둘째,  고구려는 현도군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건국했으며, 나라를 세운 이후 한 번도 중국의 영토 안에 속했던 적이 없다.

 (게시자 註, 현도군[] 국어사전,  [역사] 예전, 한사군() 하나 이르던 . 전한() 무제() 기원전 108년에 예맥() 으로, 313년에 고구려 병합되었다.) 

 

셋째, 조공·책봉은 전근대시기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중국과 맺었던 외교형식으로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속국을 판단할 수 없다. 고구려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책봉조공관계를 맺었지만 어느 왕조에게도 속박되지 않았고 중국의 왕조도 고구려를 정치적으로 간섭할 수 없었다.

 

고구려는 남북조 모두에 조공했고, 조공책봉은 전근대 시기 동아시아의 국제외교형식이자 무역활동에 불과하다. 따라서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지방정권이라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천하관은 당시 고구려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넷째,  고구려와 수·당 간의 전쟁은 국가 간에 일어난 국제전이었다. 수·당은 중원 통일 후 동아시아 일대에 중화세계를 구현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던 고구려를 정복하려고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고구려-수, 고구려-당 전쟁은 중국 중심 국제질서구축에 따른 세력권의 충돌 현상으로서 국가간의 전쟁이었다.

 

다섯째,  당으로 간 사람들 대개는 의지와는 무관하게 강제로 끌려갔으며, 그 곳에서 사라져 갔다. 하지만 신라로 내려온 사람들은 동류의식을 바탕으로 신라를 택했고, 신라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계승의식이 발해, 후삼국과 고려를 거쳐 오늘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사의 계승문제를 논할 때에는 당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망국민이 된 고구려유민이 어느 쪽으로 더 많이 편입되었는가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고구려 유민의 자의식과 계승의식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신라의 '일통삼한(一統三韓)' 의식과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중시해야한다. 중국으로 편입된 고구려유민에게는 계승의식이 없었다.

 

여섯째,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은 국호에서 보이며, 건국 초부터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을 중시하면서 북진정책을 추진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고려가 "삼국사기"를 펴냈다는 것은 고려 사람들이 고구려를 선대의 역사라고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려는 국호에서부터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고, 고구려사, 백제사, 신라사를 선대(先代)의 역사로 정리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편찬했다. 그러나 중국정사에서는 고구려 관련 내용을 시종 외국열전(外國列傳)에 배치했고, 『송사(宋史)』이래 고구려-고려를 계승관계로 서술해왔는데, 최근에 이르러 갑자기 이를 부정하는 것은 현재적 필요와 목적에 따라 과거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해나가야 할 고구려사 연구 

 

‘동북공정’의 연구사업은 비록 2007년에 종결되었지만, 중국의 동북지역 역사 연구에서 ‘동북공정식’ 연구방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고구려사를 둘러싼 역사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단시일 내에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에 동북공정기와는 다른 또 다른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역사왜곡은 없는지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상 출처; http://www.nahf.or.kr/?stype=1&sidx=67&bidx=1&bmode=view     동북아역사재단)

 

 

요즘 나오는 TV드라마 '정도전'을 보면,  명나라 주원장이 조선 개국 초의 사신에게 정도전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뿐만아니라 고려와 조선의 내정에 일일히 간섭하고 있다. 

  

아무리 픽션이라 해도 이러한 굴욕적인 장면을 자주 연출함에 있어서 역사적  확증을 얼마나 가지고 하는 건지 궁금하다. 

현재 우리나라가 거듭되는 중국의 우리역사 훼손에 대항하기 위해 강력한 반론을 펼치고 있는 마당에, 이에 반하는 드라마 작가의 무분별한 연출 태도를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건지 ....중국에 대한 우리의 반론이 무색해 지고 있다.   

 

 

광개토태왕릉을 보러 올라간다. 멀리 보이는 산은 북한 땅이다.

 

 

 

 

 

 

 

중국 땅의 건물들이 보이고, 굴뚝이 서 있는 헐벗은 산은 북녘 땅이다.

 

 

 

 

編號YM0541  高句麗第19代王好太王陵墓. 好太王( 374-412) 名談德 .....로 시작되는 호태왕의 비문(碑文)은 최근에 제작된 비문으로 보이는데,  담덕이라는 이름의 고구려 19대왕 호태왕능묘로 써 있네요.

 

이 비석은 능을 오르기 전 약 300 여 미터 지점 평지에 있음.

 

 

 

 

 

 

 

현재는 많이 무너져 상단부만 보존되어있고,  내부에는 큰 직사각형 모양의 돌이 두 개 있다. 

태왕릉은 7단의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계단 안은 작은 돌들로 채워진 것으로 보이며 도굴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광개토대왕릉 양쪽으로 중국과 북한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이색적이다.인근 장군총에 비해 능의 정교함과 예술성이 다소 떨어져 보이지만 이곳에서 "태왕릉이 산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 (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 )"라는 의미의 명문 (銘文) 벽돌이 출토되었고,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좀더 가까우며 손상되지 않았을 때 무덤의 크기도 장군총보다 클 것으로 추정되어 태왕릉으로 인정받고 있다.

 

 


 

광개토태왕릉

 

광개토대왕비에서 서쪽으로 약 2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정사각형의 계단식 석실묘로 남아있는 높이만 14,8미터,한 변의 길이가 66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다.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많이 무너져 상단부만 보존되어 있고,  흙길을 걸어 올라가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데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경비병이 지키고 있다.

 

거의 무너져 내려 초라하기 짝이없다.

 

 


 

무덤은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저 무덤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도굴은 얼마나 당했는지 알고싶다.